본래 '나 혼자 쓰는 환타지 소설'은 재작년 여름, 새벽의 꿈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제일 많이 자기도 했던 시기였지만, 꿈은 이어지고 계속 이어나가 이야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직도 저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야기는 마치 사람들이 '나니아 연대기'나 환타지 소설에서 느끼는 감동을 닮아 있었습니다. 누구든 그러한 감동을 혼자 간직하고 싶지는 않은 듯, 저 또한 그러한 감동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꿈을 꾸고 난 후 바로 쓸 때와 달리, 감동이 식어버려 문체에는 감동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일이 바쁘고 신경을 쓸 수록 이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눈 앞에 펼쳐졌던 꿈의 모습. 그것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던 환타지 소설. 그러나 꿈에서는 없는 것도 기술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서 무척 힘들게 되었습니다. 네. 꿈 속에서는 '언어'라던가 '의미 전달'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가령 14회 때 썼던 '이름'... 저는 사실 모두의 이름을 꿈에서 불렀어도, 기억할 수 없습니다. 아니, 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이름에 대한 내용만은 기억할 수 있어서 썼지만... (글 내내 사람들의 캐릭터를 반영한 이름으로 떼워 썼습니다만..)
그래서 전...
새로운 언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지금처럼 써 오는 것도 괜찮지만, 그래도 뭔가 한계가 느껴진달까요?
가끔 환타지 소설이 아닌... 연애 소설을 써볼까 합니다... (두둥!)
왠지 모르게 요새 쓰고 싶어졌습니다. (이럴수가! 솔로면서!)
그냥 쓰고 싶었습니다.
(환타지 소설에게 미안해져서...)
그러나... 가끔 씁니다. 오늘은 쓰기가 힘들어서...(시간이... 이미... 날이...)
사냥꾼과 애꾸눈은 사람들과 같이 노인의 안내를 받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무들은 큰 키를 자랑하듯,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사실 이 숲은 노인만이 지나다닐 수 있었다. 노인은 이 숲에 미로를 숨겨두었다. 키가 큰 나무로 이루어진 미로는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너무 큰 숲이라 사람의 방향감각만으로는 길을 잃기에 충분했기에, 겨우 몇 개의 돌무덤 만으로도 미로를 만들 수 있었다.
소년은 노인을 부축하며 길을 옮겼다. 노인은 나즈막한 목소리로 소년과 대화를 했다. "떨리지는 않나요?" "네, 괜찮습니다." "..." 적막함을 깨며, 노인은 말을 이어갔다. "사람은 각각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이름이요?" "네. 사냥꾼도 저도 사실은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이란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남을 부를 때 쓰는 호칭입니다." "호칭이요?" "가령 절 부르실 땐 어떻게 부르십니까?" "어르신이라 부르지요." "그러나 제가 어렸을 때엔 어떻게 불렸을까요?" "그러게요. 꼬마라거나, 청년으로 불렀나요?" "저의 젊은 시절 이름은 '일루만'이었습니다." "'일루만'이요?" "네. 주인님께서 주신 이름이지요." "그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일루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요?" "네. 다른 사람들도 저의 이름을 알고, 저를 안다면 '일루만'이라는 사람이 저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럼 사냥꾼의 이름은 무언가요?" "'리아모'입니다." "'리아모'?" "네. 그는 여러 전쟁과 기근 속에서 사람들을 모아 진두지휘하며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소년은 처음 듣는 얘기에 몰입해 있었다. '이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안 순간이었다. "그럼 사물에도 모두 이름이 있습니까?" "네. 물론이지요. 그러나 이름이 있다고 해서, 똑같은 물건이 여러개 있을 때, 별개의 이름을 갖지는 않습니다. 가령 '검'은 '검'이지요." "그렇군요. 누님께서 글과 함께 여러가지 사물의 이름을 가르쳐 주신 것이군요." "네. 다만 몇몇 특별한 것들에는 이름이 붙습니다." "네? 그런 물건도 있나요?" "네. 가령 왕자님의 검은 특별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붙어있답니다." "아, 네. 푸른 이빨이요?" "네. 그것은 왕실의 검 중 하나입니다." 한참동안 생각을 하던 소년에게 노인은 말을 이어간다. "물론, 왕자님께서도 이름이 있습니다." "제 이름은 무엇인가요?"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소년은 질문으로 노인의 말을 재촉했다. "'티모스'" "'티모스'..." "왕자님. 그러나 사람은 이름이 없다 하더라도, 각자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애꾸눈은 애꾸이기 때문에 애꾸눈이라 불리지요?" "네." "꺽다리는 키가 크기 때문에 꺽다리라 불리지 않습니까?" "네." "각자 자기 자신의 일이나, 역할, 외모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여러가지 입니다." "그럼 제 이름도 그런가요?" "아닙니다. 왕자님의 이름은 특별합니다." "그럼 제 이름은 어떻게 지어진 건가요?" "왕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왕이 지어주신 이름..." "남에게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이름을 갖고 있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남들이 알고 불러주기 때문에 이름이 생기는 것이지요. 하지만, 왕은 다릅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온 나라에 알리지요." "그렇군요. 저의 이름은..." "네. 왕자님의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 기억할 수도 없는 아버지. 그러나 이미 소년에게 검과 이름을 주었다는 것에 소년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왕자님." "네." "이번 전투가 끝나면 사람들에게 그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네?" "그 이름을 아는 자들이라면 분명 왕자님을 알고 인정해 줄 것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 잠시 목이 말랐는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술주머니의 술을 한모금 들이켰다. 가파른 산. 부축을 받고 간다지만, 노인에겐 조금은 버거운 곳이다. "잠시 쉬겠다." 노인의 걸음이 멈추자 뒤 따라오던 사냥꾼이 나즈막한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수신호를 보낸다. "리아모..." 소년은 나즈막히 사냥꾼의 이름을 불렀다. "네?" 사냥꾼은 잠시 놀라 대답하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하네. 내 왕자님께 이름에 대해 말해드렸지." "하하... 그 이름을 들은지 너무 오래 되어서 잊어버렸습니다." "그렇지. 나도 내 이름을 들어본 지가 오래되었군." "일루만...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네. 왕자님." "일루만, 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티모스 왕자님." "왕자님은 빼고요." "티모스..." 차마 이름만으로 소년을 부를 수 없었는지, 짧은 숨으로 호칭을 조용히 붙여 불렀나보다. 소년은 그런 것도 차마 맘에 안 들었나보다. "리아모,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티모스..." "다시 한 번요." "티모스." 이름을 불러주자, 소년의 얼굴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일루만." "무엇이 말입니까?" "저에게 누이도, 검도, 이름도 주셨으니, 일루만에게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야말로, 제 이름을 불러주실 수 있는 분이 살아계셔서 기쁩니다." "네?" 아리송해 하는 소년에게 사냥꾼과 노인은 서로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왕자님." "네." "사람마다 이름이 다르듯, 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이것만은 명심하십시오. 지금의 전쟁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들을 이기지 못하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게 됩니다. 그러니, 꼭 망설이지 마시고 싸우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소년의 확고한 대답을 노인과 사냥꾼의 맘에 용기를 주었다.
노인은 짊어지고 오게 한 긴 로프의 끝을 나무에 매달게 하고는, 뒤에 보이는 언덕으로 사람들이 로프를 들고 가게 했다. 언덕의 뒤로는 깍아세운 듯한 절벽이 보였다. "건투를 빕니다." 노인의 짧은 인사와 함께, 로프를 던지고, 사냥꾼과 소년, 애꾸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로프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년과 노인이 관문에 도착한지 2일 후. 마을에서 수레가 2대 왔다. 보기에도 많은 로프가 수레 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물론 약간의 먹을 것과 술이 몇 병 같이 왔다. 그리고 수레에는 사냥꾼의 딸도 따라와 있었다. "아빠~!" "오오~ 우리딸! 어디 다친데는 없었니?" "아, 여기하고 여기." 아픈 것을 자랑삼아 얘기하는 응석받이 딸의 재롱이 기쁘기만 한 사냥꾼. 그러나 그러한 재롱도 잠시. 바로 소년을 찾는다. "오빠는? 오빠는?" "글쎄... 지금은 아저씨들과 검술 연습을 하고 있을거다." "에에? 내가 온다는 거 몰랐어?" "그럴 새가 없었단다. 네가 왔다는 것을 알면 무척 좋아할거야. 어서 찾아보렴." "있다봐요~!" 딸의 인사에 흐믓한 표정을 짓던 사냥꾼의 미소가 조금씩 엷어질 때, 저 옆에 앉아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노인이 말문을 연다. "자네, 무척 안타깝겠구만.." "그러게요. 벌써 다 커서 남자를 따르다니 말이죠." "어쩌겠나. 저 나이가 되었으니, 남자를 찾아갈 만 하지." "하지만, 마을에 있던 아이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왕자님을 따르다니..."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 자, 우리도 마저 준비하러 가세." 사냥꾼과 노인은 사람들을 데리고 수레에 쌓인 로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참 격검 소리가 가득한 캠프장. 사람들의 환호소리와 함께 건장한 사내와 소년이 서로 목검으로 검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계속 움직여라! 검을 쉬지마! 상대방이 자세를 잡기 전에 쳐야지!" 그 옆에서 사내를 혼내키며 윽박지르는 애꾸눈이 서 있었다. 애꾸눈은 사람들에게 사냥꾼 다음으로 따르는, 아니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는 것은, "애꾸아저씨!" "앗! 이게 누구야?! 언제 왔니?" 사냥꾼의 딸 뿐이었다. "잠깐 쉰다! 네 녀석, 너보다 한참 적은 녀석에게 밀리다니, 네 놈은 내가 상대한다!" "아저씨! 그만 해요. 오빠가 미안해 하잖아요!" "응? 오빠라니? 누구말이냐? 저녀석?" 소년은 애꾸눈에게 이미 한 번 호되게 혼났었다. 워낙에 호전적인 성격이라 마을의 괴물들을 쫓았다는 얘기에 소년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마침 캠프를 둘러보러 온 사냥꾼과 소년에게 검술을 지도한다는 핑계로 한 판 붙었다. 물론 목검으로 서로 격검했지만, 애꾸눈은 자신의 목검으로 소년의 목검을 부러뜨리고 소년에게 한 판 승을 따냈다. "저녀석이 네녀석 오빠라고? 넌 오빠가 없잖냐?" "아냐. 오빠가 날 구해줬는걸. 아저씨! 오빠 괴롭히면 안돼!" "아아... 이거 어쩐다." "괜찮아. 아저씨는 나한테 아주 잘 해주시는걸." 땀을 닦으며 소녀에게 다가온 소년을 보고 멋적은 표정을 짓는 애꾸눈의 눈치를 보고 소녀는 "아저씨!!" 하고 소리를 지른다. "아이쿠... 아저씨 귀 안 먹었다. 그러지 마라. 이제는 정말 친하게 지내니까." "그래. 맞아. 아저씨가 내게 검술을 가르쳐주시느라 그랬던 것 뿐이야." 애꾸눈은 소년에게 빚이라도 진 듯 어쩔 줄 모른다. 소녀와 있을 때에는 고분고분한 사람이라 애꾸눈이 소녀와 같이 있을 때에는 평소 쩔쩔매던 사람들도 애꾸눈을 놀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애꾸눈은 확실히 무기를 다루는 데 소질이 있었다. 같은 무기라도 애꾸눈이 쓰면 상대방의 무기를 파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기묘한 검술 덕분인지 몰라도, 백병전에서는 그를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소년과 소녀의 모습이 질투났기 때문일까? 갑자기 또 애꾸눈이 소년에게 대련을 신청했다. "이번에는 안 봐준다. 지난 번은 살살해준거야!" "이번엔 당황하지 않겠어요. 확실히 아저씨 실력은 사기라구요." "사기? 너 이녀석, 두 번이나 당하고 사기라고 말할 수 있는지 보자." "오빠, 이겨라!" "야, 너까지 그러기냐. 이 아저씨 좀 응원해줘라." "싫어요. 오빠가 더 좋으니까 오빠편 할래요." "이녀석, 그럼 오빠를 뚜둘겨 줄테다!" "오빠는 못 이길걸요?"
소년은 지난번 대련에서 실제로는 검에 맞지 않았다. 민첩한 몸놀림 덕분인지 목검이 부러졌어도 애꾸눈에게 밀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짧은 검으로 애꾸를 밀어붙였었다. 하지만, 사냥꾼이 말리면서 소년이 애꾸눈에게 검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애꾸는 자기 기술을 보여주기는 커녕 오히려 캠프에 있던 사람들의 검술 상대로서 혹사 시키기만 했다. 애꾸는 소년이 가진 검이 무척이나 좋은 검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는 소년의 문제점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이 쓰는 검은 소년의 몸을 담보로 하는 물건이라는 것을...
한참 격검이 이뤄지면서 두 사람 얼굴에는 조금씩 여유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꼬마. 네녀석 이번엔 꽤 오랫동안 버티는 걸? 하지만, 아직 멀었어." "그러는 아저씨야 말로 사기치지 않고 잘 싸우시는걸요?" "네녀석. 그런걸 사기라고 말하면 넌 아직 철부지라는 소리야. 넌 이제 끝이다." 애꾸의 외마디 기합에 다시 소년의 검은 부러졌다. "자. 거기까지!" 저녁이 되어 캠프로 돌아온 사냥꾼은 애꾸눈과 소년의 시합을 보다가 이전과 같은 전개를 보고 다시 대련을 멈췄다. "아니, 왜 자꾸 멈추고 그래요? 저 녀석, 아직까지 제대로 검을 다룰 줄 모르는데.." "괜찮아. 이제 곧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알 거라네." "그나저나 저렇게 힘 센 놈이 어디 있었답니까? 저번에 마을로 왔을 때 그 비리비리한 녀석 맞나요?" "그렇다네. 정말로 몸을 사리지 않지. 그게 걱정이라네." "네. 저렇게 자기 무기와 몸을 돌보지 않는 녀석은 처음이에요." 두 사람의 이야기에 소년은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소녀는 두 사람의 대련을 쭉 지켜보면서도 분명 소년이 더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냥꾼과 애꾸눈의 대화는 왜인지 모르지만 소년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녀는 소년에게 다가가 물었다. "괜찮아? 어디 다치진 않았어?" "응. 괜찮아. 조금 손바닥이 까진 것 뿐이야." 소년의 손은 물집이 생겨서 이미 터져 있었다. 분명 이전까진 없었던 것이었는데... "괜찮아? 많이 아프겠다. 내가 곧 치료해줄께." 소녀는 소년의 손을 끌어 캠프 내의 창고로 데리고 갔다.
사냥꾼과 애꾸눈은 한참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저녁식사를 끝낼 때까지, 애꾸눈과 사냥꾼은 한참 얘기를 한 후,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를 들려줬다. "잘 들어라. 우리는 밤이 깊어지고, 달이 뜨기 바로 전의 새벽에 일어나 저 산을 넘어간다. 모두들 지금 미리 눈을 붙여두도록 해라." 사람들의 모습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산을 넘는다는 얘기에 조금은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산을 넘는게 가능한 일이던가? 사람들은 저마다 쑥덕댔지만, 사냥꾼의 말이기에 모두들 무언가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잠시 동안의 대화가 이어지고는 모두들 모포를 두르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소년도 사냥꾼과 같이 캠프 내의 화톳불에 앉았다. "애꾸눈에게 자꾸 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니?" "아냐, 오빠는 지지 않았어." "제 검이 부러지는 것은 제 무기가 약해서 그런것 아닌가요?" "아니다. 그것만이 아냐. 애꾸눈도 너와 같이 싸우는 것이 무척 힘들긴 하다만, 네가 가지지 못한 것을 알고 있지." "그게 무언가요?" "애꾸눈은 너의 검술 실력을 무척 높게 평가한단다. 너 혼자 익혔다는 사실에 더 놀라워하지." "오빠는 역시 강하지?" "그래. 무척 강하단다. 하지만, 너에게 꼭 익혔으면 하는 것이 있단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무기를 다루는 법. 여태까지 네 검은 너의 힘을 의지해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 네가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검으로부터 받는 충격이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검을 오랫동안 휘두르고 있으면 몸에 무리가 온단다. 다른 사람들이 너의 검을 쉽게 막지 못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 "그럼 이틀간 사람들의 검술 대련을 시킨것은 무엇 때문이죠?" "목검은 실제 검보다 가벼우면서도 충격을 완화해준단다. 네게는 힘을 빼게 하기 위해 그랬을지도 몰라. 적의 검만큼 적절한 힘으로 상대방을 상대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지." "..."
소년은 눈을 감고 생각해본다. 애꾸눈의 검은 확실히 강해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대련을 할 때 보다는 훨씬 쉽게 지치고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애꾸눈은 무엇을 알고 있는걸까? 소년은 그가 자신의 목검을 2번이나 부러뜨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플거야." 소녀가 소년의 손의 물집을 두르던 붕대를 벗겨내면서 술로 적신 거즈를 대었다. 소년은 멍하니 소녀에게 손을 맡기고 무언가 골똘한 생각을 하나보다. 사냥꾼은 아픈 표정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조금은 실망한 듯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괜찮아.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럴거다. 처치가 끝났으면 일찍 자자." 소녀를 잠자리에 눕혔다.
숲에 어둠이 내렸다. 어둠은 화톳불 주변만을 남기고 깊게 쌓여있었다. 아니, 경계를 보던 관문 위의 사람들과 캠프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어둠은 내리지 않았다. 사냥꾼은 조용히 사람들을 모았다. "오늘 새벽. 달이 뜨기 전에 저 산을 넘어 적진으로 들어간다. 모두들 술병과 로프를 챙기도록. 춥다고 생각하면 술을 한 모금씩 마시도록 해. 하지만 취하지는 말라구." 농담섞인 지시에 사람들은 긴장했던 모습이 조금 풀렸다. 노인도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한 마디를 건낸다. "이 산을 넘어가면 들어올 때에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네. 만약 이 일이 실패해서 되돌아오게 된다면, 적에게 뒤를 밟히지 않도록 빨리 퇴각해야 하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출발하게." 사람들은 로프를 어깨에 두르고 캠프를 조용히 떠나기 시작했다. 아직은 별빛만으로 어둑어둑한 하늘이었다.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숲. 그 숲은 나무가 복잡하게 자리잡고 자라고 있었고, 나무마다 너비와 지름이 큰데다 높게 자라서 쉽사리 길을 낼 수 없는 숲이다. 숲은 넓게 펼쳐져 있고, 남서쪽으로 지나갈수록 점점 가파른 경사면이 이어진다. 높은 나무가 경사면을 따라 빽빽히 늘어서있고, 그 너머로는 깍아지른 경사면이 이어진다. 나무도 자라지 않는 민둥산이지만, 반대편의 나무 뿌리들이 깊게 흙들을 붙잡아주고 있어서인지, 뾰족한 산은 낮아지거나 허물어지지 않고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다랗게 늘어선 산 때문인지 마을로 들어가려면 뱃길이 아니면 들어가기가 무척 힘들다. 단 한군데, 산맥이 끊어지고, 좁은 통로가 하나 있는데, 이 길에 마을 사람들은 성문을 두고, 흙으로 틈을 메운 다음, 남쪽에는 구운 벽돌과 돌들을 쌓아놓았다. 자연과 인간이 만든 최고의 방벽이었다.
이 문은 마을로 들어가는 관문이나 다름없었다. 문이 있는 곳도 간신히 수레 하나가 지나갈 수 있는 폭이기 때문에 성문을 공략하는 방법으로 공격하려 하여도, 공격범위가 좁아서 공격할 수 없다. 오히려 많은 군사들을 세워두었다가는 문 위의 궁병에게 죽기 쉽상이었다. 돌이나 기름으로 문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경사가 있는 곳이라 공성병기를 옮기다가 까딱 잘못하면 깔리기 쉽상이었다. 마을의 병사는 200명 남짓한 숫자이지만, 수만의 군사들도 이곳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을을 침범하려는 무리가 문이 아닌 곳을 넘어가려고 무수한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산을 넘으면 항상 눈이 쌓여있고, 가파지른 언덕에 나무가 빼곡히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시야가 가려서 숲을 빠져 나오려고 헤마다가 얼어죽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기 마련이었다. 마을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산을 넘기 위해 갑옷이나 제대로 된 무기조차 들고 올 수 없게 된다. 오랫동안 그런 상황이라 마을에서도 성문 앞에 온 군사들에게만 신경썼을 뿐, 만약 소년이 없었다면 성문을 수비하던 사람들은 무척이나 허탈해 했을 것이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과 소년은 굽이굽이 구부러진 숲 속의 길을 통해 숲을 가다 쉬다를 멈춰서 이틀만에 성문을 지키는 사람들의 캠프에 도착했다. 성문은 항상 50~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지키고 있으며, 계절이 변할 때마다 마을에 있는 사람들과 교대로 지키게 되어 있었다. 성문이 공격받고 있을 때에는 200명 내외의 마을 총 인원이 이곳 캠프에 모여서 하루에 2번 교대로 성문을 지키고 있게 된다.
마을에서 봤던 사람들이 소년을 알아보고는 사냥꾼에게 사람을 보냈다. 나이 든 현자를 모시고 온 소년을 사람들은 별로 신기하게 보지 않는 듯한 눈치다. 그들은 소년의 무용담을 듣기 전이라 소년이 성문으로 온 것이 왜 온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나이많은 어르신을 부축하기 위해 왔을것이라 생각하나보다.
사냥꾼은 성문위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분명 그들은 너무나 느긋했다. 성에서 공격하기 위해 나가는 일은 없는 것을 알고 화살이 미치지 않는 먼 곳에 진을 치고는 병사들을 쉬게 하고 있었다. 적극적인 공격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척이나 이상한 행동임에 틀림없었다. 집단으로 산을 넘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냥꾼의 짐작은 맞아 떨어졌다. 별동대가 마을을 급습했었고, 소년과 꺽다리가 그 공격을 막았다는 어르신의 얘기에 사냥꾼은 안도와 함께 소년에 대한 대견함마저 느끼게 되었다.
덧붙여 어르신은 소년의 정체를 사냥꾼에게 조용히 알려주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소년의 신분이 왕족인 것을 안 이상 사냥꾼은 무척 곤란하게 되었다. 그를 돕고 같이 지냈던 시간을 생각하면 사냥꾼은 소년이 그저 자신의 아이와 같은 생각이 들기만 한다. 늠름하고 듬직한 아들. 그가 아직 아들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소년은 무척이나 살뜰하고 뿌듯한 존재였는데... 그가 왕자라는 사실이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다.
소년은 사냥꾼이 있는 곳으로 왔다. "아저씨. 저 왔어요." 사냥꾼의 그런 맘이 얼굴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소년은 급하게 사냥꾼을 향해 달려왔다. 무언가 칭찬이라도 바라는 아이의 얼굴처럼 희색이 돌고 있는 소년을 본 사냥꾼은 무심결에 "왕자님, 장하십니다." 라는 엉뚱한 얘기를 해버렸다. 소년도 자기 자신이 '왕자'라고 불리는 것이 어색하다. "아저씨, 그냥 예전처럼 대해주세요. 전 왕자도 아니고, 그저 떠돌이인걸요." "그러나..." "그러게나. 나처럼 늙은이나 왕자님을 왕자님이라 부를법하지. 자네에겐 어울리지 않아." 소년을 왕자라고 부르며 부담을 얹어주기 보다는 친근한 사이로 지내는 것이 소년에게 더 좋으리라 생각한 노인의 농담이었다. 사냥꾼도 멋적게 소년을 보며, "그.. 그럴까...?" 라며 운을 떼본다. 서로 상기된 두 뺨을 맞대며 소년과 사냥꾼은 예전처럼 포옹하며 인사를 나눈다. "마을에서 있었던 일은 들어서 알고 있다. 장하구나." "꺽다리 아저씨가 다 막아주신 덕분인걸요." "그래도 내 딸을 지킨건 너다. 그 아이가 무사하지 못했다면, 난 이곳에 있을 수 없었을 것 같구나. 네가 한 일이 이 문을 지킨 것과 다름없구나." "그렇지. 지금까지 사냥꾼이 없었다면 적이 이 산을 넘으려고 얼마나 아웅다웅했을지 모르니까. 그가 이 곳에 없다면 군도 이 문을 공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을거야." 세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았다. 이 성의 의미와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 이곳을 지키는 방법 등등... 이번 일은 정말 예상외의 일이었기에 노인은 조금 걱정되는 눈치였다. "이제 이 성에서만 지키는 것은 그만 하세. 아마 적은 점점 더 유효한 방법으로 성문을 지나지 않고 공격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어. 이제 곧 이 성문을 뒤로하고 마을에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러나 현재의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마을과 이곳에서 지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네. 왕자님이 이곳에 계시는 이상 더 기다릴 필요는 없네. 이전의 국토를 수복하기 위해서라도 옛 백성들을 모아 다시 군대를 편성해야지. 이번 습격의 결과를 적은 아직 모르고 있을 걸세. 우리보다 먼저 이 문을 넘지는 않을테니까. 빠른 시간안에 적을 습격해야 하네." "적은 현재 활 거리보다 멀리 진을 치고 있습니다. 경사도 완만한 곳이라 낙석이나 화공도 하기 힘듭니다. 거기에 저희쪽 문은 하나. 적은 항상 이곳 문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나갈 수 있겠습니까?" "적의 허를 찌르려면 적과 같이 길이 아닌 곳으로 이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네? 저 경사면을 타고 내려가자고요?" 소년은 어르신의 말에 짐짓 놀랐다. 성벽 주변의 산들은 가파르기도 했지만, 발 디딜곳도 없어 보였다. "걱정말거라.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기 위해선 힘든 댓가를 치러야 하지만, 이곳에선 무척 쉽게 넘어갈 수 있단다. 물론 저쪽으로 넘어가면 이 문을 통하지 않고는 다시 되돌아오기 힘들지만 말야."
소년의 활약과 키다리 아저씨(?)의 활약으로 마을은 다시 평안함을 되찾았다. 소년이 처음 마을에 나타났을 때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사람들도 소년의 활약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그는 새로 나타난 영웅이었다. 불태워져 없어졌던 담과 벽들을 세우고, 눈사태로 덮힌 논밭들을 다시 개간하는 사람들의 모습속에서 소년은 처음으로 그들과 같은 동지애를 느끼게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힘든일에 아랑곳 않고 마을을 착실히 회복해 나갔다.
몇 일 지나서였을까, 소년도 마을 정비에 같이 참여하여 눈에 덮힌 집을 수리하러 갔다가, 방어기지로부터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듣고 마을 광장으로 나가보았다. 길 가는 동안 사람들의 눈에는 무언가 기대가 찬 모습이 느껴졌다.
마을 중앙에는 허름한 옷차림에 달구지를 타고 온 연로한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달구지에서 내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노인을 존경하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이가 그 소년인가?"
멀리 서 있던 노인이 처음으로 한 얘기에 사람들은 소년을 알아보고 길을 터주었다. 소년은 얼떨결에 노인의 앞으로 가서 인사를 했다.
"늠름한 소년이군요. 자... 추우니 잠시 사냥꾼의 집에 가서 얘기해볼까요?"
그와 함께 사냥꾼의 집으로 돌아갔더니, 아주머니는 무척이나 놀란 기색을 보이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어르신. 어서 들어오세요."
아주머니의 뒷 쪽에서 삐쭉거리며 서 있는 소녀를 보고 노인은 반가운 목소리로 얘기를 꺼냈다.
"아, 수줍은 소녀가 되었구나."
소녀는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하다가, 눈짓으로 아는채를 하며 고개를 숙이곤 부엌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이 노인이 사냥꾼과도 아는 사이임을 알아채고는 그의 행동거지가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번 마을에서의 적을 훌륭히 막았다고 들었다오. 이 늙은이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얘기해줄 수 있겠오?"
사냥꾼의 딸과 부인에게도 이 노인은 경어로 상대방을 대하지 않았다. 왜 자신에게만 경어로 대하는지 궁금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자신에게 장난으로 대하는 것은 아니라 여겨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야기가 한참 지나고, 죽은 누이의 무덤을 두고 돌아왔다는 얘기를 끝마친 후 소년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잠시 서글픈 눈을 하고는,
"그랬군요... 그랬었군요... 참 장하십니다... 장하세요."
라고 말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누이의 유품을 갖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소년은 자신의 검 외에는 가지고 온 것이 없다고 말하며, 검을 보여주었다.
"아주 좋은 검입니다. 꼭 잊지 마십시오. 이 검의 이름은 푸른 이빨이랍니다."
노인은 이 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소년은 노인에 대한 궁금증이 넘쳐났다.
"이 검을 아시는겁니까? 이 검은 제 아버지께서 주신 검이라고 누이가 말했습니다. 이 검에 대해 아신다면 제 아버지에 대해서도 아시는 것입니까?"
"먼 길을 와서 조금 지치는군요. 그 얘기는 나중에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추운 날씨에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셨을텐데, 저희 방을 치워두었습니다. 들어와서 몸을 누이세요."
"고마워요. 항상 신세를 지는군요."
소년은 갑자기 나타난 할아버지의 정체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그가 얘기를 꺼내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소녀에게 할아버지에 대해 물어봤다.
"너, 저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게 있어?"
"나 어렸을 때 봤던 할아버지야. 가끔 마을에 오셔."
"지금도 어린데 얼마나 어렸을 때?"
"몰라! 내가 왜 어리다는거야?"
아깐 할아버지 앞에서 수줍어하더니 자기 앞에선 화를 버럭 내는 모양새에 소년은 흠칫 놀란다.
'정말 무서운 할아버지였나보다. 자기도 감당 안되는 소녀를 부끄럽게 만들 정도라면...'
자기 나이를 셈해보아도 훨씬 어린 사냥꾼의 딸이 더 어렸을 때이니, 아마도 그리 오래전은 아닌가보다. 한 1, 2년 전에 왔었겠지? 그가 매해 한 번 마을에 온다는 것은 그의 일이 범상치 않은 일인 것임에 틀림 없었다.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다시 눈 덮힌 마을의 집을 수리하러 나갔을 때,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났다.
"어르신이 오셨다며? 어디계셔?"
"어르신은 주무시러 들어가셨어요. 그런데 왜 어르신이에요?"
"아~ 몰라. 너한테 얘기한다는 것을 깜빡했구나. 저 분은 이 나라 전체를 돌아다니시면서 사람들을 만나보시는 분이셔. 이 나라의 국왕도 저 분을 함부로 하진 못하지. 사람들은 저 노인이 나타나면 해로운 식충의 문제나 전염병에 대해 물어보고, 도움을 받기 일쑤라 저 분을 현자라고 불러. 그 분은 이 나라에서 모르는게 없는 분이시거든. 아무튼 너 어르신이랑 만나봤냐?"
"네. 아까까지 있다가..."
"뭐라고 하셨어?"
"음... 칼을 지니고 다니라고..."
"에? 그것 뿐이었어?"
"네."
"하긴... 뭐, 네 칼 정말 좋더라. 나도 그런 칼 갖고 싶어."
"그 칼은 제 거에요. 탐내지 마세요."
"알아알아. 잘 간수해. 어르신이 간수 잘 하라고 하신것 보면 분명 범상치 않은 물건일거야."
현자...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의 검에 대한 얘기를 알만하다 생각하며, 하던 일을 계속 하러 마을로 돌아갔다.
다음날이 되어 사냥꾼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는 동안 어르신이라 불리는 노인이 같은 식탁에 앉았다.
"이곳이 맘에 듭니까?"
대뜸 소년에게 아침부터 물어본 말에 소년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네. 아주 좋아요. 하지만 제게 너무 어렵게 대해주지 마세요.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신 분인데 어째서 제게 경어를 쓰시나요?"
"그건 차차 알게 됩니다. 어제 말했던 오두막 말인데, 한 번 다녀와주지 않겠습니까?"
"네? 예전에 살던 집으로요?"
"네. 누이와 살던 집으로 가시면 분명 누이가 하고 있던 목걸이가 있을 겁니다. 그것을 찾아와 주십시오."
"하지만, 그곳에서 온지 적어도 5달은 되었는데요."
"괜찮습니다. 가서 목걸이만 찾아와주시면 됩니다."
"갔다오는 데에 족히 1주일은 걸릴텐데, 그 때 까지 계시는건가요?"
"네. 물론이죠. 이곳에 계속 있을테니, 갔다오십시오."
소년은 의아함을 풀지 못하고 그저 하라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 내일 갔다올께요."
"아니, 지금 바로 갔다오십시오."
"..."
"네? 그렇게 빨리요?"
소년보다 먼저 놀란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 것은 사냥꾼의 딸이었다.
"할아버지, 왜 오빠를 다시 보내는 거에요?"
"미안하다. 꼭 확인하고 싶은게 있구나."
"그래도 거기엔 짐승도 많고, 오빠가 왔을 땐 많이 아파했던 곳인데, 갔다오면 또 아프잖아요."
"괜찮아. 이번엔 제대로 옷도 갖고 있고, 사냥꾼 아저씨 활도 있으니까, 갔다오는데 힘들지 않을거야."
"그래도... 그래도..."
울먹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소녀에게 소년은 머리를 다독거리면서 괜찮다는 말을 멈추지 못했다.
"알았어. 대신 빨리 갔다와."
"응, 그래. 빨리 갔다 올께."
소년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노인이 대뜸 소년을 쳐다보다가, 다른 말을 한마디 꺼냈다.
"사냥꾼의 썰매가 있을테니, 그것을 끌고 갔다 오십시오."
그리고는 소년을 데리고 집의 뜰 옆에 있는 창고에 가서 소년에게 무언가를 가리켜 보였다. 커다란 나무를 깎아 매끄럽게 만들어 붙인 썰매가 먼지를 쓰고 있었다.
'현자에겐 다른 사람의 집에 있는 물건도 다 알고 있나보다.'
소년은 아주머니께서 싸주신 육포와 장작, 도끼, 가죽옷을 받아들고 썰매에 묶어 빨리 길을 재촉했다. 검과 활, 화살을 챙기고 한 손으론 썰매를 끌며 출발했다.
"빨리 갔다와야 해~"
동네 밖으로 나갈 때 소녀가 흔드는 손을 보고 같이 손을 흔들며 소년은 다시 예전의 집으로 돌아갔다.
급작스러웠던 업화의 불길은 다행히 수그러들었고, 어둡고 깊숙한 곳에 움크려있던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밖으로 나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듯이 정리를 시작했다. 어지간히도 괴롭힘을 당해왔었나 보다. 소년은 태연한 그들의 모습에 약간은 알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상처를 입었던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엔 다행스럽게도 화색이 돌았다. 어린 아이의 몸으로 큰 상처를 입었음에도, 슬퍼하거나 아픈 기색도 없이 소년이 나타나면 웃기만 한다. 희미해져간 기억 속에서 소년의 숨결을 느꼈을 때부터 이전과는 다른 미소를 띄며 소년을 바라보기만 했다. 소년은 의아하기만 했다. 예전같으면 재잘거리며 웃었을 아이가 아무런 말도 없이 수줍게 미소만 띄고 있으니, 다친 기억 때문에 힘들면서도 참고 있는 것이라 착각하곤, 측은한 눈길로 여자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발톱에 긁힌 자국이 선홍빛 선으로 남아있지만, 여자아이의 어머니는 팔다리가 찢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짐승에게 물려서 뼈 한두마디는 부러졌으리라 생각했었지만, 여자아이의 얇은 팔이 짐승의 이빨 사이에 들어갈 정도로 여려서 다행이었다.
소년은 여자아이의 어머니에게 미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말없이 울상을 짓고 있는 소년에게 여자아이의 어머니는 조용히 다가와 소년을 품에 안았다.
소년의 누이. 자신의 실수로 인해 상처받았던 누이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던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어리고 상냥한 생명에게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다니... 소년은 말없이 소녀를 품에 안았다. 아파하는 소녀를 한 손으로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 칼을 잡았다. 어떻게든 안전한 곳으로 옮겨줘야 했다.
숨어있던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까 모습을 숨긴 그 사람들. 그들이 바로 대륙의 술사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소년의 존재가 거슬렸기에 함정으로 유인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소년. 한 손에 든 검을 바로 잡았다.
검은 짐승들이 소년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소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그의 심장은 심하게 울리고 있었고, 점점 동공이 열리며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숨은 점점 크고 깊게 쉬기 시작했다. 그의 몸 주변으로 뭔가 묘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짐승들도 그런 기운을 느끼고 있는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뒤에 있던 술사들의 손짓에 짐승 하나가 뛰쳐 나왔다.
순간 소년의 손이 허공을 가르고, 어디로 향할지 모르던 검이 짐승의 몸을 지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비명없이 한 마리 짐승이 땅에 떨어졌다. 다른 무리는 그 모습을 보고 주춤했고, 소년은 조용히 한 걸음을 이동했다. 한 걸음씩. 조용히. 눈으로 덮힌 땅 위를 눈이 눌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무겁게, 무겁게...
소년의 앞을 막아섰던 짐승도 조금씩 뒷걸음질쳤다. 점점 술사에게 가까워지는 소년. 그림자 속에 있던 두 술사들은 소년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주문을 외웠다. 눈의 골렘이 소년의 앞을 가로막아섰다. 소년은 전혀 두려움 없이 계속 무겁게 움직였다. 골렘은 소년을 덮쳤지만, 소년의 검은 가차없이 골렘을 향해 나아갔고, 푸른 빛의 섬광과 함께 골렘은 갈라졌다. 골렘의 깊은 눈덩이를 밟은 소년의 앞에 술사가 서 있었다.
술사는 소년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몸이 얼어버릴 정도로 차가웠다.
...
소녀의 몸은 다행히 식지 않았고, 갸냘픈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눈 위의 두 사람의 시체는 점점 차가워져갔고 짐승들은 그 자리를 떠나갔다. 소년은 소녀의 입에 숨을 불어넣고는 소녀의 집으로 돌아갔다.
날이 밝아오자, 마을에서 사람이 왔다.
"남쪽 대륙의 군대가 진군하고 있다고 하네. 마을에선 무기를 다루는 자들을 모으고 있다네."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다시 올라오고 있나보군."
사냥꾼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 있다.
"잠시만... 나중에 찾아가지."
사냥꾼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듯 소년을 찾아와 말했다.
"네가 들어줬으면 하는 얘기가 있구나."
"무슨 일이시죠?"
"곧 전쟁이 일어난단다."
"전쟁? 이 북쪽 끝에도 전쟁이 일어나나요?"
"그래. 이곳에선 남쪽에서 도망 온 학자나 술사들이 많기 때문이지."
"그럼 아저씨도 도망 온 사람인가요?"
"..."
한동안 얘기를 못 잇는 사냥꾼.
"그래, 난 남쪽 대륙에서 왔단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사람들이 필요하단다."
"하지만, 아저씨는 그들과 함께 가지 않지요?"
"그래.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들은 우리를 데리고 갈 수 없었단다. 헌데 문제는 이전에도 실패한 일을 반복할 정도로 저들은 어리석지 않단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아."
"이유요?"
"그래. 난 사람들을 데리고 남쪽 대륙의 군대를 맞으러 마을을 비워야 한단다. 하지만, 그들이 이 마을을 노리고 올 것 같단다. 네가 막아줬으면 좋겠구나."
"제가요?"
"그래."
"전 아는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하지만 네겐 의지하고 싶구나. 나의 아내와 딸을 부탁한다. 할 수 있겠지?"
"네. 그럴께요."
사냥꾼의 황급한 부탁에 아무 생각없이 대답한 소년을 뒤로하고, 사냥꾼은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다급한 와중에 소년의 검을 집었다가 짐칫 놀랐다.
"왜그러세요?"
"아니... 아니다. 돌아와서 얘기하마. 꼭 살아 남아야 한다."
"네."
사냥꾼이 건낸 검을 받고 소년은 물러섰다.
마을사람들은 민첩하게 훈련된 군사와 같았다.
그들은 사냥꾼의 말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곧 마을을 떠났고, 소년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안은 채 사냥꾼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야, 이거 누군가 했더니 꼬마잖아?"
"?"
누구인지 몰라도, 큰 키의 남자가 소년을 보고 있었다.
"아아~ 걱정하지마. 난 장.. 아니, 사냥꾼의 부탁으로 널 지켜보러 온거야."
큰 키에 큰 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단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는 남자.
그는 소년을 훑어보더니 지시를 내린다.
"자! 우린 할 일이 많아. 빨리 움직이자!"
그는 소년과 함께 마을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소년에게 지시사항을 내렸다.
"잠깐만요. 왜 이래야 하는거죠?"
"넌 전쟁을 몰라. 전술도, 전략도. 장군, 아니 사냥꾼은 너에게 그걸 가르쳐두랬어."
"네? 장군이요?"
"아~참! 넌 몰라! 그 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잔말 말고 잘 기억해둬!"
생김새와 달리 성급한 이 남자는 소년을 닥달해가며 적이 올 곳에 올가미를 쳐두고, 함정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소년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해가며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얘기해줬다.
"분명히 이 마을에 급습이 있을거야. 없으면 더 좋고. 잘 들어. 평소에는 장군이 나에게 맡으라고 했던 일을 너에게 일임하라고 했어. 네가 검을 잘 쓴다며? 이번 전쟁엔 분명 사람이 나서진 않을거야. 네게는 다행스러운 일이겠지. 하지만 명심해둬. 사람이 아닌만큼 그것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공격해올거야. 넌 꼭 그것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리고 못 버티겠으면 내가 지시한대로 움직이도록 해. 명심해라! 꼭!"
"그것이라뇨?"
"괴물이지."
"괴물?"
"그래. 남방의 술사들은 괴물을 만들어 공격하는 기술이 있어. 아마도 네 검을 보시곤 네게 이 일을 맡기셨을지도 몰라."
"..."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소년은 그저 멍하니 있었다.
"뭐해! 빨리 움직여! 이제 곧 나타날 때가 다가온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소년은 마을 어귀에 눈 덮힌 언덕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왔어요!"
소년은 무엇이 왔는지도 모르면서 소리쳤다.
"가자!"
키 큰 남자는 잽싸게 뛰어가면서 소년을 데리고 뛴다.
눈이 울렁거리더니 큰 덩어리로 뭉쳐서는 마을을 향해 덮쳐오기 시작했다.
"네가 저것들을 베어버려!"
소년은 알 수 없는 눈덩이들을 베기 시작했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엔 큰 덩어리의 눈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빨리! 더 빨리!"
마을의 경계에 몰려드는 눈덩이들을 하나씩 제거해갔지만,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눈덩이들은 이내 마을로 덮쳐 들어오는가 싶더니 마을 경계를 지나고선 눈으로 변해 파도를 이뤘다.
"올가미가 눈에 덮혔다! 저 쪽으로 짐승들이 오기 시작할꺼야! 뛰어!"
키 큰 남자는 건물 옆에 세워둔 기름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멀리서 짐승이 떼로 달려들었고, 남자는 횃불을 들어 기름병이 깨진 자리에 불을 붙였다. 불은 순식간에 붙고 눈으로 덮혔던 곳 위로 불의 장벽이 일어났다. 짐승이 짐짓 물러난 틈을 타서 소년은 검으로 짐승들을 베기 시작했다. 짐승 무리가 갈피를 못잡는 사이, 반 남짓한 짐승들이 쓰러졌다. 짐승들은 점점 몰리는가 싶더니 도망가기 시작했다.
"일단, 한 숨 돌렸다."
키 큰 남자는 경계를 풀지 않으면서 소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하자구... 아무래도 저녀석들 좀 일찍 물러선 것 같다. 다시 올거야."
소년은 가뿐 숨을 몰아쉬며 또 온다는 얘기에 긴장했다.
"이젠 언제 오느냐가 문제야. 분명 어두워지면 다시 나타날거야."
"헌데 왜 이 쪽으로만 오죠? 다른 쪽도 분명 오기 쉬울텐데요."
"다른 쪽은 대부분 넓은 평원이라 숨을 곳이 없어. 군사나 사람들이 몰려왔다면 멀리서도 보이지. 하지만, 이 쪽은 숲이 우거져서 몸을 숨길 수 있지. 마을에서도 얼마 떨어지지 않아서 숨어서도 상황을 파악하기 쉬워. 한 두명의 술사라면 이곳으로 올거야."
"왜 올 줄 알고 있었죠?"
"많은 수의 군인이라면 이미 들어왔을 때 우리가 알았을거야. 멀리서 군이 온다는 얘기는 너도 들었잖아? 이번에도 같은 방법으로 온다는 얘기에 장군이 분명 술사들의 잠입을 눈치채셨을거야. 올가미와 함정의 절반은 못 쓰게 되었지만, 나머지는 쓸 수 있는 상태로 남아있어. 눈덩어리가 덮쳐 올 줄 몰랐지만, 아마 저들도 너의 존재를 알고는 놀랐을거다."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어요."
"장군의 출정을 방해해서 요충지를 먼저 확보하고 쳐들어 올 계획이었을거야. 이곳에서 요새까지는 하루 거리라서 한시라도 늦으면 방어가 불가능해. 남국의 병사가 많음에도 이곳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요새 때문이거든. 분명 우리의 저항도 눈치 채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겠지만, 네가 등장하고 나서 순식간에 계획이 틀어져 버린 것을 알고는 일찍 물러난 것일게다."
"..."
짧은 말로 사람을 다그치던 사람이 이리도 말이 많을 줄이야... 소년은 궁금한게 많았지만, 키 큰 남자의 닥달에 다시 이곳저곳을 불려다니며 적을 맞을 채비를 했다. 마을 사람들도 이곳저곳에 기름통과 장작을 준비해줬다. 아이들은 나무를 날카롭게 깎아서 눈 아래 땅에 묻었다. 아이들이 능숙하게 일을 하는 것을 보니, 이런 일이 한 두번은 아닌듯 싶었다.
한참 시간이 지났을 무렵, 저녁이 되어 소년은 아이들이 나눠 준 빵을 입에 물고는 마을 어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새벽에 꾼 꿈은 혹시 이런 일을 예상한 것이었을까? 소년은 자신의 마음에 걸렸던 일이 이런 일을 예상한 것인가 생각해본다. 그 사이 따뜻한 물을 컵에 담아 소년에게 갖다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사냥꾼의 어린 딸이었다.
"자! 이것 좀 마셔!"
"응? 아, 고마워."
"안 아파?"
"응? 응. 안 아파."
"나 어렸을 땐 아팠는데."
"응? 어디가 아팠는데?"
"배도 아팠고, 머리도 아팠고, 팔도 아팠고, 다리도 아팠고... 피도 났어."
"피?"
"응. 아빠가 데리고 가서 안 아프게 뽀뽀도 해주고 해서 안 아팠어."
이 아이의 얘기는 무엇을 말하는지 몰랐지만, 비슷한 상황이 예전에도 있었고, 아이들이 다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 이제 너도 돌아가. 이제 여긴 위험해. 어서. 엄마에게 돌아가."
"응!"
불섶을 지나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소년은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방심했었던 것일까? 키 큰 남자의 외마디 외침이 들려왔다.
"습격이다!"
한 순간 고요했던 마을이 난장판이 되었다.
"제길, 우리의 계획을 모두 보고 있었어. 함정이 있을 곳을 모두 피해왔어."
키 큰 남자는 아이들을 보호하며 이동하고 있었고, 소년은 칼을 잡고 짐승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마을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짐승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소년은 뛰어다니며 짐승을 하나씩 잡기 시작했다. 칼날에 스치는 듯 해도 짐승들은 쉽게 쓰러졌다. 이 때 이상한 차림의 사람이 뛰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소년이 바라보자 그 둘은 피하듯이 뛰어갔다. 소년이 뒤따라 갔지만, 이내 불 섶에서 불이 붙은 장작을 기름통에 던지고는 도망했다. 기름통에 불이 붙어 마을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고, 뛰어다니는 짐승들도 불길을 피해 달아나버렸다.
"어서, 불붙은 건물의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켜!!!"
소년은 문을 두들겨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다,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 아파... 아파..."
소년의 눈 앞엔 불에 그을린 사냥꾼의 어린 딸이 짐승들의 잇자국이 난 몸을 움츠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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