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귀가가 늦지는 않았다.
그래도 소녀는 무척 늦었다는 듯이 두 볼이 개구리 마냥 퉁퉁 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분명 일주일이랬잖아!"
"미안. 하지만, 일주일 맞잖아. 어제까지 7일이고, 오늘이 8일째니까..."
"일주일 걸린다며! 왜 거짓말해! 왜!"
"미안해. 앞으로는 거짓말 안할께."
"그래. 오빠도 네게 거짓말한 것도 아닌데, 왜 거짓말이라고 말하니.
오빠는 피곤하니까 네가 힘들게 하지 말아야지."
소녀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짐짓 분이 안 풀린듯 씩씩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몸 건강히 잘 갔다온 것 같구나. 너는 역시 강한 아이였어. 들어오렴. 힘들었지?"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썰매덕분에 많은 짐을 실어 갈 수 있어서 편하게 지냈어요."
"저 아이, 무척 화내고 있는 것 같지만, 어젠 네가 하루종일 안오나 기다리다가,
밤에 잠도 안 자고 얼굴이 퉁퉁 부었단다. 어젯 밤엔 네가 혹시 죽은거 아니냐고 울기도 했단다?"
"내가 언제!!!!!"
저 멀리서 소녀가 힐끗 보다 성난 목소리로 한껏 소리를 질렀다.
소년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딱 7일 후. 늦은 오후시간이 되어서였다.
누이의 무덤을 다시 파 낼 용기도 없었고, 집을 다시 떠나려니 발길이 안 떨어지기도 했다.
할 수 없이 눈 덮혀 있는 지붕을 새로 얹고, 더럽혀진 집도 정리하고,
문도 단단하게 다시 달아놓다보니, 시간이 조금 늦었던 것이다.
집으로 들어가니 벌써 저녁식사 준비가 되었다.
"네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 차려봤단다."
식탁엔 한참 보지 못했던 신선한 야채와 고기들로 가득했다.
산딸기 잼에 부드럽고 따뜻한 빵까지 있었다.
"와~ 진수성찬이에요. 너무 감사합니다."
"이 늙은이 먹을 것도 조금 주게나..."
왁자지껄한 소리에 노인이 내려왔나 보다.
"자리에 앉으세요. 감자 스프를 만들어 뒀습니다."
"고맙네. 늙은이가 너무 오랫동안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노인은 감자스프에 따뜻한 빵을 뜯어, 적셔 먹고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집으로 갔다오는 동안 별 탈 없이 잘 갔다왔습니까?"
"어르신, 말씀 낮추세요. 전 아무 문제 없이 잘 다녀왔습니다. 다만..."
"다만?"
소년은 말 끝을 흐리며, 손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노인 앞에 갖다 두었다.
"누이의 목걸인, 누이가 잠들었을 이미 목에 매고 있어서... 잠이 든 누이를 다시
깨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서랍에서 누님의 책으로 보이는 것이 있어서 여기.."
노인은 늘어진 눈꺼풀에 힘을 주고 책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노인의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머나먼 옛적, 노인은 궁 안에서 모든 시무를 담당하던 관리였다고 했다. 국왕은 너그러웠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며, 주변 국가들이 넘보지 못할 만큼 강했고, 사회는 안정되어
굶주린 자들도 없고, 사람들이 서로를 보살펴 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했다.
젊은 국왕이었지만, 일이 바빠서 슬하에 자식이 없다가, 늦은 시기 아들을 얻어 모든 백성이
그 일을 기뻐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태어날 즈음, 외부의 세력으로부터 군사력을
빌어 국가를 전복하려 한 무리들이 궁중을 덮쳐 왕과 왕비는 죽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빠져나와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피난하였다고 했다.
소년은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질문하였다.
"그럼 이 곳에 있는 분들은 그 때 피난오셨던 분들이시군요?"
"네, 맞습니다. 그 때 흩어졌다가 자리를 잡은 무리들이 모여 이곳에 정착하였지요."
"그럼 왜 어르신께서는 이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방랑하셨던 것입니까?"
"전 그 때, 제 자신은 궁에 남아 항복하였고, 제 여식을 통해 왕자님을 멀리 피난시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나마 후사를 위해 왕자님이 도망가실 시간을 벌었지요. 제 여식은 왕자님을
데리고 피난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모습을 숨겼다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갔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때에는 도망간 자들을 색출해내어 죽였던 일들도 많았으니까요.
저는 한동안 나라 안의 사람들을 다독이며, 그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왔습니다.
이것이 저의 주인이었던 분께는 죄스러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분께서는 사람들이
악정으로 핍박받는 것을 좋아하시지는 않으셨겠죠. 저도 그 분의 맘을 알기에 사람들을
위해 여러가지 일들을 한다고 했습니다만... 최근에 남쪽 대륙의 군대가 우리의 땅을
짓밟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여식을 찾기 위해 한동안 나라를 샅샅이 뒤졌지만, 제 여식의
행방을 알 수 없다가, 최근에야 그 소식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따님은 무사하신가요?"
"아닙니다. 여기 이 책의 주인이 제 딸일 것입니다."
순간, 소년은 그 얘기의 주인공이 자신의 누이임을 알고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뭔가 잘못 아신듯 합니다. 저희 부모님은 천을 파는 상인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내용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책의 첫 장을 넘겼다.
그 책엔 처녀의 몸으로 왕자를 데리고 다니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 천 짓는 일과,
나무 장작을 모으는 일을 하며 생활을 유지하다가, 마을이 한 두개씩 사라지고, 군대에 의해
피습받는 일이 많아지자, 사람들을 떠나 머나 먼 북쪽 땅으로 왔던 이야기가 써 있었다.
이후론 소년의 성장과 함께, 여러가지 고민을 적어둔 것들을 보았다.
왕자로서 살아야 될 존재가 이렇듯 시골 구석에서 자신과 함께 아무런 지식도 얻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고뇌하면서도, 스스로 검을 잡고 노력하던 것에 대해 기쁜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내용까지...
소년은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누나가 진짜 누나가 아님에도 그토록 다정하게 대해주며
자신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으면서도 슬펐다.
왕자라는 존재로 태어난 자신이 아니었으면, 그러한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텐데,
자신때문에 고생을 하고, 부모와 떨어져 지내야 했던 누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자신의 한심함이 자기 자신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소년의 눈은 벌겋게 상기되었고, 이내 겉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말 없이 고개를 떨군 소년의 어깨를 노인의 손이 감싸며, 흐느끼며 말을 이어갔다.
"왕자님께서 누이라 생각해주시면, 누이라 여겨주십시오. 제 딸도 기뻐할 것입니다.
또한 제 딸도 왕자님을 동생처럼 아끼며, 이렇듯 훌륭하게 키워주었으니 돌아가신
주인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눈물을 거두십시오."
소년은 눈물을 훔치고 노인을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저 때문에..."
"왕자님 탓이 아닙니다. 못난 저희들 탓입니다. 저희가 강성했고, 아버님을 지켜드릴 수
있었다면, 그러한 일은 없었을텐데..."
한동안 서로 소리없이 우는 두 사람을 보고, 사냥꾼의 아내는 눈물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떠다놓은 스프가 다 식었을 무렵. 아주머니는 두 사람에게 새 스프를 떠주며 말을 이었다.
"식기 전에 드세요. 떠나시기 전에 든든히 드셔야죠."
"네? 떠나다니요?"
"이 늙은이는 왕자님을 찾기 위해 수년간 늙은 몸을 이끌고 변두리 마을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야 뵐 수 있을줄은 몰랐던게죠. 다행히 장군께서 왕자님을 알아보고
이곳에 저를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함께 적의 무리가 같이 오는 바람에
방어기지엔 식량과 무기가 더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왕자님의 늠름한 소식을 듣고는 전장에서도 왕자님의 힘이 필요하게 된 것이죠.
충분히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소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것도 큰 부담이 되었지만, 갑자기 전장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 또한 부담스러웠다.
"오늘은 피곤할테니 주무시고, 내일 출발하도록 하시죠."
소년은 노인과 아주머니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자신의 불안한 맘을 감추진 못했나보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누이... 자신의 동생도 아니면서 자신을 동생처럼 아껴주고, 자신을 보호해줬던 사람.
자신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보호해 줄 수 있었을까?
아련한 기억 속에서 누이의 모습을 다시 그려보려 했지만, 누이의 모습이 선명히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보아도 선명하지 않은 기억때문인지, 소년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눈을 찡그리며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을 때, 자신의 이불을 들추고는 누군가가 들어왔다.
"오빠, 우는거야?"
"아... 아냐... 네 방에서 자지 왜 또 왔어?"
"미안해, 오빠. 아까 내가 화내서 그러는거지? 미안해. 잘못했어. 울지마..."
"아니래두... 울지 않았다니까. 자꾸 왜 그래..."
눈을 비비며 지그시 소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누님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미안.. 난 내 생각만 했나봐. 나, 안 울께."
"그럼 나 오빠랑 같이 자도 돼?"
"응? 왜?"
"오빠, 나중에 가니까..."
말 끝을 흐리는 소녀에게 소년은 자신을 동생처럼 생각해 준 누이처럼,
자신도 또한 소녀에게 오빠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나가 자신을 보살펴 준 시간에 비하면 짧은 한 순간.
소녀에게 별다른 추억도 주지 못한채 떠나야 하는 자신은 터럭만큼도
누이에게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 순간이라도 이 아이에게 다정하게 대해 줄 수 있다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소년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래, 같이 자자."
고 말했다. 소녀는 소년의 몸에 찰싹 안겨서는 꼼짝도 않고 잠이 들었다.
소년을 기다리느라 지친 소녀는 소년의 품에 안겨 안도하게 되었나보다.
소년은 그 날 밤. 누이에 대한 기억과 이 마을에서 지냈던 추억을 되새기며
짧은 밤. 한 때의 시간을 눈을 감으며 상기하고 있었다.
TAG 환타지 소설
받은 트랙백이 없고,
댓글 span class="cnt"하나/span가 달렸습니다.



글
댓글을 달아 주세요
댓글 RSS 주소 : http://snwslug.fossa.kr/~jachin/rss/comment/118댓글 ATOM 주소 : http://snwslug.fossa.kr/~jachin/atom/comment/118
우와,,, 오랜만에 와서 전부 읽었어요-,^^
너무 재밌게 잘 읽고 가용~~ > _</ 재밌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