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 P는 P시에서 상경하여 S시에서 직장생활 중이다. 나이는 27세. 막막한 P시에서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었고, 어떻게든 자기 한 몸 건사해서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군대갔다오고,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이런저런 소프트웨어 경시대회에서 상도 탄 탓에 바로 직장을 잡을 수 있었다. 다행히 저금으로 월세 보증금과 한 달치 월세를 낼 수 있어서, 부모님께 손벌리지 않고 바로 정착할 수 있었다.
현재는 3년차 프로그래머. 하지만, 회사 운영은 그리 녹녹치 않은지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대기업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로부터 하청을 받아 운영하는 편이다. 덕분에 P에게는 얼토당토않은 여러가지 주문이 쏟아져 나왔고, 매번 프로그래밍 언어나 환경이 바뀌다보니, 넓게 배우고 얕게 익힌게 많았다. 그에게 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프로그램의 오류, 그에게 떨어지는 잔업은 프로그램의 동작 신뢰도와 성능 개선을 위한 일이 주였다.
그의 일과는 일이 전부다시피 했다. 공식적으론 토요일과 일요일이 휴무였지만, 고객의 전화와 출근이 없었을 뿐, 그의 손에는 항상 일거리가 있었다. 월화수목금금금같은 나날들. 젊은 시기의 노력이 보상받을 수 있는 방법은 통장 잔고에 쌓이는 저금이어야 하건만, 그에겐 한달 월세를 꼬박꼬박 지불하고, 남은 돈으로 끼니와 교통비, 한숨 돌리러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사먹을 수 있는 돈이 전부이다. 그나마 그 커피도 비싸서 일주일에 2번 마시기도 힘들다.
그래서인지, P의 인맥관계는 좁고, 그 흔한 트친, 미친, 페친도 별로 없었다. 회사 내에 누가 있는지도 잘 모르니까. 아는 사람만 알고 지내는 좁은 현실. 그의 월세방만큼이나 좁고 답답했다. 그나마 골몰히 자유소프트웨어 프로젝트에 참여해 주변 사람들과 알고 지내는 정도. 회사 일이 프로그래밍인데도, 할 수 있는 일이 프로그래밍 뿐이라 취미활동도 프로그래밍이 되어버린 안타까운 경우이다.
하루는 회사에서 하청 프로젝트가 끝난 후 회식을 했다. 이것도 사장이 일을 독촉해서 계약 기간보다 2일이나 앞당긴 탓에, '갑'님께서 보내주신 회사경비 지출용 카드로 회식을 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야식은 있어도 회식은 없었는데, 대부분 야식비용을 모으면 매달 회식비를 충당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날은 P도 오랫만에 회식자리에 앉게 되었다. 다른 부서 사람들도 있는 탓에 어떻게 할줄 몰라 전전긍긍하고 술집 회식자리 끄트머리에 앉아있던 터였다. 이날 회식엔 갑님 회사 부서 사람들도 모여있었는데, 자신보다 바깥쪽 자리에 외국인 여성직원도 있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한국 회식문화가 정서에 안 맞아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자신처럼 떨어져 나와 있는 것처럼 보였다. P는 오랫만에 컴퓨터가 아닌, 인간과 영어로 대화할 기회가 생각하고 엉성한 영어를 구사해보려 했다.
"Hi~! My name is P."
"....."
그녀는 자신의 인사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는지,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부분 외국사람들은 먼저 인사하고 다가가면 인사는 받아준다던데, 그녀는 역시 '갑'님의 직원답게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듯 했다.
'이... 이사람 뭐지.... 사람 무안하게...'
"Isn't there your name for me?"
"Debbie.(데비)"
"아... 아하하... ^^;;;('참자, 참아. 갑님이시잖아.... 흑....')"
그러나 그녀는 P가 건네주는 술잔을 받아들고 묵묵히 술을 마시며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공허한 침묵이 흐르고 있으니, 그나마 그가 먼저 얘기를 꺼내서 침묵을 깨고자 했다.
"Do you know Linux?"
"....."
아, 그렇지. 이 질문은 여성에게 하지말아야 할 분야 중 하나였다. '역시 전산쟁이, 공돌이'라는 명칭들이 따라붙는 데에 일조하는 질문을 해버렸다. 이런데에 관심있는 여자가 어디있다고...
"I like Linux. Don't know?
"I know."
어...? 의외다. 알고는 있구나. 그제서야 P는 자기얘기를 짧은 영어로 끼워맞춰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월화수목금금금을 프로그래밍만 하는 그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곤 OS 얘기, 프로그래밍 언어얘기, DB 엔진이나 수학얘기가 전부였다. 그런 얘기에 그녀는 묵묵하게, "Yes."나 "No." 혹은 "I know."로 짧게 답해줬다.
회식은 서서히 막바지로 끝나가는지, 회사 동료들은 하나 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다른 갑님 직원님의 비위를 맞추며, 2차, 3차 회식도 뜯어먹을 기세로 붙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이 동조하는 분위기이지만, P는 회식자리가 껄그러웠다. 하지만 데비에게 겨우 말 붙여서 친해질까 생각했는데, 벌써 가려니 아쉽기도 했다. P는 데비에게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돌리며 작별인사를 하려고 했다. 헌데 그녀는 다른 직원들과 같이 가지 않고 자신쪽으로 걸어오는게 아닌가? 그가 용기를 내서 말해보았다.
"If you don't mind fast food restaurant, I could pay for your snacks."
"... O.K."
겨우 용기를 내서 한 말이 패스트푸드점에 가겠냐는 얘기라니...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얇은 지갑 사정에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나마 패스트푸드점이라면 밥만큼이나 자주 먹으니 그나마 그가 제안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였다.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햄버거와 감자튀김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P. 그런 P를 유심히 보기만 하고, 대답만 하는 데비. 시간은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흘러가지만 그녀는 가보겠다는 얘기도 하지 않고 그를 보고만 있었다. P는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고 이해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좋았는지, 자정이 넘어 새벽으로 넘어가도 프로그래밍에 대한 이야기는 멈출줄을 몰랐다.
점점 날은 밝아 오고, 24시간동안 운영하는 패스트푸드점에도 새벽손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변 분위기가 아침이 되어가는 것을 느낀 P는 그제서야 자신의 얘기를 멈추고 시계를 들여다봤다. 새벽 5시! 출근하려면 7시에는 가야 하는데, 그녀는 출근시간이 없는걸까? 왜 얘기를 안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P는 데비에게 자신이 출근해야 하는 것을 알려야 했지만, 짧은 영어 때문에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는 시계를 가리키며 한 마디 했다.
"I have to go home."
"...."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는 조그마한 소리로 대답했다.
"I have no room key."
응? 그... 그래서 같이 있었던 건가? 뭔가 맘이 복잡한 P였다.
출근시간은 가까워져 있었고, 그녀가 어디에서 지내는지도 모르니, 바로 회사로 가자고 했지만, 그녀는 고개만 저을 뿐 말이 없다. 뭐라 할 수는 없는 상황. 아마도 밤새 다른 회사 남자직원과 같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회사를 출근해야 하니, 자신의 월세방으로 무작정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녀도 그런 그를 따라 왔다. 그녀는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 별로 신경쓰지 않는 태도라,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월세방 열쇠를 주고는 출근해야 한다고 알려주고, 편히 쉬다가 출근하라고 말한 후, 열쇠를 두고 갈 장소까지 알려주고 출근을 했다.
밤새 떠들고 얘기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지하철에 앉아 꾸벅꾸벅 졸며 체력을 보충한 후, 한시간 걸려 도착한 회사에 들어가보니, 회사는 떠들썩 했다. 어제 납품한 소스코드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 다음날 내로 처리하지 않으면 계약 기간이 넘어가버리니, 갑님 지갑에서 나간 돈을 다 토해내야 할 판국이다. 사장님과 다른 회사 사람들은 어제의 회식에 숙취까지 겪으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결국 P에게 일이 주어지고 만다. 회사에서는 하루종일 고성방가와 재촉, 전화벨 소리가 울려퍼지고, P는 비몽사몽간에 이런저런 소스코드를 짜지만, 피곤에 찌들며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결국 퇴근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회식 후여서 그런지, 직원들 대부분이 퇴근 후, 다음날을 기약하기로 하고, 일단 잔업거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P도 소스코드를 메모리에 저장하고 월세방으로 돌아왔다.
습관처럼 열쇠를 넣어두었던 곳에 손을 넣었지만, 열쇠는 없었다. 그제서야 그가 데비에게 열쇠를 준 것을 기억해내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안에는 데비가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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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템 추카염 :D
감사감사. ㅋㅋㅋ